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1903년 창단된 스페인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 11번의 라 리가 우승을 포함하여 다수의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했다. 마드리드를 연고지로 하며, 레알 마드리드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는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이끌고 있으며, 앙투안 그리즈만이 구단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홈 구장은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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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1903년 4월 26일,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세 명의 바스크인 학생들이 '아틀레틱 클루브 수쿠르살 데 마드리드'(Athletic Club Sucursal de Madrid)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211][9][156] 이들은 아틀레틱 빌바오의 유소년팀으로 여겼으며, 그 해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하는 것을 목격했다. 1904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반대 세력이 구단에 합류했다.[212][10]
엔리케 아옌데, 1903년 창단 이후 초대 구단주
초창기 아틀레티코는 아틀레틱 빌바오와 마찬가지로 청색과 백색이 반반 섞인 유니폼을 사용했지만, 1911년에 현재와 같은 적색과 백색 줄무늬 유니폼으로 변경했다.[158] 이는 침대 매트리스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베갯잇 색깔과 같아 유니폼 제작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로 인해 '매트리스 제작자들'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아틀레틱 빌바오와 아틀레틱 마드리드 모두 블랙번 로버스의 청색 백색 반반 유니폼을 잉글랜드에서 구매했으나, 1909년 말 아틀레틱 마드리드의 전 선수이자 이사진이었던 후아니토 엘로르두이가 블랙번 유니폼을 구하지 못하고 사우샘프턴의 적색과 백색 유니폼을 대신 구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14][13] 아틀레틱 마드리드는 적색과 백색 유니폼을 채택하여 '적백 군단'(Los Rojiblancos)이라는 별칭을 얻었지만,[216][217] 빌바오와 달리 기존의 파란색 하의를 계속 사용했다.[218][159]
1910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새로운 빨간색과 흰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단
아틀레틱의 첫 홈구장은 론다 데 바예카스였으며, 1919년 '마드리드 도시화 공사'가 캠퍼스타운 인근 토지를 매입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1921년, 아틀레틱 마드리드는 아틀레틱 빌바오로부터 독립하고 35,800명 수용 규모의 마드리드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으로 이전했다.[220][18]
1920년대에 아틀레틱은 중부 선수권 대회에서 3차례 우승하고, 1921년과 1926년에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1928년 라 리가 출범 당시 1부 리그 참가 구단이 되었으나, 두 시즌 만에 세군다 디비시온으로 강등되었다. 1934년 라 리가로 복귀했지만, 1936년에 다시 강등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레알 오비에도의 구장이 파괴되어 강등이 보류되었고, 이후 오사수나와의 플레이오프전에서 승리하여 강등을 면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는 군대의 팀이 되어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클럽명이 된 것은 1947년이었다.
2. 1. 창립과 초창기 (1903년 ~ 1939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1903년 4월 26일,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세 명의 바스크인 학생들이 '아틀레틱 클루브 수쿠르살 데 마드리드'(Athletic Club Sucursal de Madrid)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211][9][156] 이들은 아틀레틱 빌바오의 유소년팀으로 여겼으며, 그 해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하는 것을 목격했다. 1904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반대 세력이 구단에 합류했다.[212][10]
초창기 아틀레티코는 아틀레틱 빌바오와 마찬가지로 청색과 백색이 반반 섞인 유니폼을 사용했지만, 1911년에 현재와 같은 적색과 백색 줄무늬 유니폼으로 변경했다.[158] 이는 침대 매트리스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베갯잇 색깔과 같아 유니폼 제작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로 인해 '매트리스 제작자들'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아틀레틱 빌바오와 아틀레틱 마드리드 모두 블랙번 로버스의 청색 백색 반반 유니폼을 잉글랜드에서 구매했으나, 1909년 말 아틀레틱 마드리드의 전 선수이자 이사진이었던 후아니토 엘로르두이가 블랙번 유니폼을 구하지 못하고 사우샘프턴의 적색과 백색 유니폼을 대신 구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14][13] 아틀레틱 마드리드는 적색과 백색 유니폼을 채택하여 '적백 군단'(Los Rojiblancos)이라는 별칭을 얻었지만,[216][217] 빌바오와 달리 기존의 파란색 하의를 계속 사용했다.[218][159]
아틀레틱의 첫 홈구장은 론다 데 바예카스였으며, 1919년 '마드리드 도시화 공사'가 캠퍼스타운 인근 토지를 매입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1921년, 아틀레틱 마드리드는 아틀레틱 빌바오로부터 독립하고 35,800명 수용 규모의 마드리드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으로 이전했다.[220][18]
1920년대에 아틀레틱은 중부 선수권 대회에서 3차례 우승하고, 1921년과 1926년에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1928년 라 리가 출범 당시 1부 리그 참가 구단이 되었으나, 두 시즌 만에 세군다 디비시온으로 강등되었다. 1934년 라 리가로 복귀했지만, 1936년에 다시 강등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레알 오비에도의 구장이 파괴되어 강등이 보류되었고, 이후 오사수나와의 플레이오프전에서 승리하여 강등을 면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는 군대의 팀이 되어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클럽명이 된 것은 1947년이었다.
2. 2. 아틀레틱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 (1939년 ~ 1947년)
1939년, 라 리가가 재개되었을 때, 아틀레틱은 사라고사의 아비아시온 나시오날(''국립 항공대'')와 합병하여 ''아틀레틱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Athletic Aviación de Madrid, ''마드리드의 항공대 체육단'')가 되었다. 아비아시온 나시오날은 1937년 스페인 공군의 세 명의 공군 장교에 의해 창설되었다.[19]스페인 내전으로 8명의 선수를 잃은 아틀레틱 마드리드와 합병되었다.[19] 아틀레틱 아비아시온은 레알 오비에도가 전쟁으로 경기장이 파괴되어 참가 자격을 상실하자, 이들을 대신해 CA 오사수나와의 플레이오프에서 3-1로 승리하여 1939-40 시즌 라 리가에 참가했다.[19] 전설적인 리카르도 사모라의 지휘 하에, 이 구단은 사상 첫 라 리가를 우승했고, 1941년에는 정상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이며 인상적인 선수로는 1939년에 라싱 산탄데르에서 이적하여 주장이 된 헤르만 고메스가 있었다. 그는 1947-48 시즌까지 ''적백 군단''의 일원으로 8시즌 연속으로 활동했다. 중앙 미드필더였던 고메스는 마친과 라몬 가빌론도와 함께 전설적인 중원을 구축했다.
1941년, 프랑코가 제시한 정책에 따라[222] 외국어를 구단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구단명은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데 마드리드''(Atlético Aviación de Madrid)로 개칭되었다.[21] 1940년 9월,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은 1940 코파 델 제네랄리시모 우승팀인 RCD 에스파뇰을 2차전 합계 10–4, 두 번째 경기에서 7–1로 승리하여 스페인 축구 역사상 첫 번째 수페르코파에서 우승했다.[22] 1947년, 구단은 군 단체의 명칭을 구단명에서 지웠고, 현재의 명칭인 ''클루브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Club Atlético de Madrid)로 개칭했다. 같은 해에 아틀레티코는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이겼는데, 이는 구단이 거둔 마드리드 더비 역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 경기였다.[223][23]
2. 3. 황금기 (1947년 ~ 1965년)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의 임기 동안, 라르비 벤바레크의 활약에 힘입어 아틀레티코는 1949-50 시즌과 1950-51 시즌에 2년 연속 라 리가 우승을 거두었다.[24][25][26] 에레라가 1953년에 구단을 떠난 후, 아틀레티코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게 밀려 1950년대 남은 기간 동안 아틀레틱 빌바오와 스페인 3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의 2인자 자리를 크게 위협하였다. 1957-58 시즌, 페르디난트 다우치크 감독은 아틀레티코를 라 리가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결과 유러피언컵에 진출하였다. 브라질인 중앙 공격수 바바와 엔리케 코야르의 활약으로, 아틀레티코는 드룸콘드라, CSKA 소피아, 샬케 04를 연파하고 준결승전에 올랐으나,[224]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합계 2-3으로 패배했다.
1961년과 1980년 사이, 레알 마드리드는 14차례 라 리가를 우승하며 스페인 축구를 지배하였지만, 아틀레티코는 1966년, 1970년, 1973년, 1977년에 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대항마로 활약했다. 또한 1961년, 1963년, 1965년에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도 1965년, 1972년, 1976년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특히 1965년에는 8년 만에 처음으로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은 구단으로 기록되었다.
아틀레티코는 유러피언컵 결승으로 가는 길에 갈라타사라이, 디나모 부쿠레슈티, 츠르베나 즈베즈다, 셀틱을 차례로 꺾었다.[232] 특히 셀틱과의 준결승 1차전에서는 아얄라, 디아스, 교체 선수 키케가 퇴장당하는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는 대회 역사상 최악의 반칙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233]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틀레티코는 원정에서 0-0 무승부를 거두고, 홈에서 가라테와 아델라르도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다.[233]
에젤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했다. 아얄라, 디아스, 키케가 징계로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라고네스가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넣었다.[234] 그러나 경기 막판 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재경기를 치르게 되었다.[234] 이틀 후 열린 재경기에서 아틀레티코는 울리 회네스와 게르트 뮐러에게 각각 2골씩을 내주며 0-4로 패배, 준우승에 머물렀다.[234]
2. 5.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 시대 (1974년 ~ 1987년)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아틀레티코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며, 구단의 감독을 4차례 역임하였다.[235] 아라고네스는 1974년부터 1980년, 1982년에서 1987년, 1991년부터 1993년, 그리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감독직을 네 차례 나누어 역임하였다. 그의 임기에서의 첫 성공은 바이에른 뮌헨이 바쁜 일정으로 인터콘티넨털컵에 불참하게 되면서 찾아왔고, 아틀레티코는 바이에른을 대신하여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상대는 아르헨티나의 인데펜디엔테로,[235] 원정에서 0-1로 졌지만, 2차전 안방 경기에서 하비에르 이루레타와 루벤 아얄라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었다.[236] 아라고네스는 이어서 1976년에 코파 델 레이 우승, 1977년에 라 리가 우승을 거두었다.
아라고네스는 그의 두 번째 임기 와중에 1985년라리가 준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룩하였다. 그는 19번 리그 득점을 기록하여 트로페오 ''피치치''를 획득한 우고 산체스의 도움을 받았다. 산체스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2골을 삽입하며 아틀레틱 빌바오를 2-1로 제압하였다. 그러나, 산체스는 이후 도시를 가로질러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였다. 아라고네스는 산체스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1985년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우승하고 1986년의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계속 성공가도를 달려나갔다. 그러나, 아틀레티코는 디나모 키이우에 0-3으로 패하며 3회 연속 유럽대항전 결승전 패배를 기록하였다.[237][238]
2. 6. 전환기 (1987년 ~ 2005년)
1987년, 논란의 정치인이자 사업가인 헤수스 힐이 구단 회장으로 취임하여 2003년 5월에 사임할 때까지 구단을 운영했다.[240] 힐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거액의 이적을 성사시켰는데, 포르투에서 유러피언컵을 갓 우승한 포르투갈의 측면 미드필더 파울루 푸트르가 대표적이다.[241] 하지만, 아틀레티코는 1991년과 1992년에 코파 델 레이를 2년 연속 우승했을 뿐, 리그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요한 크라위프의 바르셀로나에 10점 차로 밀려 준우승을 거둔 1990-91 시즌이 리그 우승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였다. 힐 회장은 리그 정상에 오르기 위해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론 앳킨슨, 하비에르 클레멘테, 토미슬라브 이비치, 프란시스코 마투라나, 알피오 바실레, 루이스 아라고네스 등 유명 감독들을 선임하고 경질하는 것을 반복했다. 1992년에는 구단 유소년부를 해체했고,[242] 당시 15세였던 라울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이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로 증명되었다.[243]
1994-95 시즌에는 리그 최종일에 무승부를 거두며 간신히 강등을 피했다. 1995년 여름,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 부임 후, 1995-96 시즌에 라 리가/코파 델 레이 2관왕을 달성하며 오랜 숙원을 이뤘다.[211]안티치는 헤수스 힐 회장 임기 동안 3차례 아틀레티코 감독을 맡았는데, 그 중 1996년에 리그와 컵을 모두 석권했다.
라도미르 안티치는 헤수스 힐 회장 임기에 3차례 아틀레티코 감독을 맡았는데, 이 중 1996년에 리그와 컵을 모두 석권했다.
다음 시즌인 1996-97 시즌에는 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으나 8강에서 아약스에 패했다. 1997-98 시즌을 앞두고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주니뉴를 영입했지만, 힐은 1998년 여름에 안티치 감독을 아리고 사키로 교체했고, 사키는 6개월 만에 구단을 떠났다.
1999-2000 시즌은 아틀레티코 역사상 최악의 시즌이었다. 1999년 12월, 힐과 그의 이사진은 구단 재정 오용으로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고, 정부가 임명한 행정가가 구단을 운영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팀이 17위로 강등 위기에 처하자 사임했고, 안티치가 다시 복귀했지만, 코파 델 레이 결승 진출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는 66년 만에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244]
아틀레티코는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2년을 보냈고, 2002년에 우승을 차지하며 1부 리그로 복귀했다.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아틀레티코에서의 마지막 임기에 팀을 다시 라 리가로 승격시켰고,[245]페르난도 토레스의 라 리가 데뷔를 이끌었다.[246]
페르난도 토레스는 아틀레티코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2006년 아틀레티코는 포르투갈 미드필더 코스티냐와 마니셰, 그리고 아르헨티나 공격수 세르히오 아구에로를 영입했다.[53] 2007년 7월, 페르난도 토레스는 3,800만 유로에 리버풀로 이적했고,[54] 같은 시기에 루이스 가르시아가 무관한 이적으로 클럽에 입단했다.[54] 또한 클럽은 우루과이 국가대표이자, 전 유러피언 골든 부츠 및 ''피치치'' 수상자인 디에고 포를란을 비야레알에서 약 2,100만 유로에 영입했다.[55] 그 외에도 벤피카에서 시망 사브로자를 2,000만 유로에, 아스날에서 윙어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를 1,200만 유로에 영입했다.[56][57]
2007년 7월, 아틀레티코 이사회는 경기장이 위치한 토지를 매각하고 클럽을 시 소유의 올림픽 경기장으로 이전하기로 마드리드 시와 합의했다. 경기장은 2016년에 소유주가 변경되어 클럽이 3,040만 유로에 매입했다.[58] 마드리드는 2016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지만 리우데자네이루에 패했다.[59]
2007-08 시즌은 지난 10년간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팀은 UEFA컵 32강에 진출했으나 볼턴 원더러스에게 패했다.[60] 또한 코파 델 레이 8강에 진출하여 우승팀 발렌시아에게 패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팀이 리그 시즌을 4위로 마쳐 1996-97 시즌 이후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 자격을 얻었다는 점이다.[61]
2008-09 시즌 동안 디에고 포를란은 라 리가에서 32골을 득점하며 스페인과 유럽의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2009년 2월 3일, 하비에르 아기레는 시즌 초반 부진으로 6경기 무승을 기록한 뒤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나중에 이것이 정확하지 않으며, 해고가 아닌 상호 합의에 의해 떠났다고 주장했다.[62] 그의 해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아틀레티코의 문제의 원인이 그가 아니라고 믿었고, 디에고 포를란은 "하비에르를 해임하는 것은 쉬운 해결책이었지만 그는 우리 문제의 원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대로 플레이하지 못하고 많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선수들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했다.[63] 이로 인해 아벨 레시노가 아틀레티코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63] 아틀레티코는 리그 4위를 기록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 라운드 진출을 확정했다. 디에고 포를란은 해당 시즌 32골을 기록하며 ''피치치''와 유러피언 골든 슈를 수상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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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레티코는 레알 베티스 수비수 후아니토를 자유 계약으로 영입하고,[65] 베테랑 골키퍼 레오 프랑코를 유소년 출신 다비드 데 헤아로 교체, 레알 바야돌리드에서 유망주 세르히오 아센호를 영입하며 챔피언스 리그 시즌을 위한 스쿼드를 보강했다.
그러나 2009-10 시즌은 많은 패배와 실점으로 시작되었다. 10월 21일,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 첼시에게 4-0으로 패배하자,[66] 아틀레티코 경영진은 아벨 레시노 감독이 사임해야 한다고 발표했다.[67] 미카엘 라우드루프 영입에 실패한 후,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68][69]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 감독 부임 이후, 아틀레티코는 2009-10 시즌 라 리가에서 9위로 마쳤지만, 2009-10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 3위를 차지하여 유로파 리그 32강에 진출했다. 아틀레티코는 유로파 리그 결승전에서 디에고 포를란의 2골로 풀럼을 2-1로 꺾고 우승했다.[74] 이는 1961-62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이후 처음이었다.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도 진출했지만 세비야에 2-0으로 패했다.[75] 2010 UEFA 슈퍼컵에서는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와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골로 인터 밀란을 2-0으로 꺾고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76]
2010-11 시즌, 아틀레티코는 리그 7위, 코파 델 레이 8강, 유로파 리그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시즌이 끝나기 전에 산체스 플로레스 감독이 떠났고,[77] 그리고리오 만사노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78]
2. 8.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시대 (2011년 ~ 현재)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은 2011년 12월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했다.[79][80][81][82] 시메오네 감독은 선수 시절의 맹렬함을 바탕으로 아틀레티코에 끈기있는 정신력을 불어넣었다.[80]티보 쿠르투아, 디에고 고딘을 중심으로 강력한 수비를 구축하는데 집중하여 부임후 첫 6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80]
시메오네는 부임 첫 해인 2011-12 시즌에 UEFA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끌었다.[83][84] 결승전에서 라다멜 팔카오의 두 골과 지에구의 골로 아틀레틱 빌바오를 3-0으로 꺾었다.[83][84] 이어진 UEFA 슈퍼컵에서는 첼시를 상대로 팔카오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1 대승을 거두었다. 2013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2-1로 꺾고 14년 만에 마드리드 더비 승리를 거두었다.[85][86]
2013-14 시즌에는 바르셀로나와의 최종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1996년 이후 처음으로 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87] 다비드 비야는 이 시즌 아틀레티코의 라리가 우승에 일조했다.
같은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레알 마드리드에 1-4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88]
2015-16 시즌에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또다시 레알 마드리드에 승부차기 끝에 패배했다.[91]
앙투안 그리에즈만, 아틀레티코 역대 최다 득점자, 2018년 UEFA 유로파 리그 우승
앙투안 그리에즈만은 2014년에 아틀레티코에 합류하여[89][90] 5시즌 연속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2016년 발롱도르에서 3위를 차지했다.[90]
2017년, 구단은 비센테 칼데론에서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로 홈 구장을 이전했다.[92][93]
2017-18 시즌에는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에서 마르세유를 3-0으로 꺾고 우승했다.[94] 이어진 UEFA 슈퍼컵에서도 레알 마드리드를 4-2로 꺾었다.[95]
2020-21 시즌에는 바야돌리드를 2-1로 꺾고 7년 만에 라 리가 우승을 탈환했다.[98] 루이스 수아레스는 이 시즌 아틀레티코의 라리가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96][97]
2021년 5월 23일, 라 리가 우승컵을 들고 있는 시메오네
3. 경기장
알레티의 현 안방인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
구단은 현재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에서 안방 경기를 치르는데, 이 경기장은 마드리드의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전에서 패한 뒤, 구단이 경기장을 매입하여 수용 인원을 20,000명에서 68,000명으로 증대시켰다.[306] 경기장을 재단장한 후, 아틀레티코는 구장 개장 경기 상대로 말라가를 불러들였고, 앙투안 그리즈만이 새 구장의 1호골 주인공이 되었다.[30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20,000석 규모(라 페이네타로 알려졌을 때)에서 마드리드의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 실패 이후 68,000석으로 확장된 시비타스 메트로폴리타노를 홈 구장으로 사용한다.
경기장 리모델링 후, 개조된 경기장에서 아틀레티코와 말라가의 첫 번째 공식 경기가 열렸으며, 앙투안 그리에즈만이 이 경기장에서 클럽의 첫 골을 넣었다.[12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2017년까지 수용 인원 54,990명의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을 사용했다.[185] 또한, 창설부터 1923년까지 ''론다 데 바예카스''를 본거지로 사용했으나, 1923년에 에스타디오 메트로폴리타노 데 마드리드를 건설하면서 비센테 칼데론으로 이전한 1966년까지 이곳에서 경기를 치렀다.
클럽은 현재 시비타스 메트로폴리타노 (구칭: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186] 이전 경기장인 비센테 칼데론은 2020년 6월부터 철거가 진행되었으며, 부지에는 만사나레스 강과 면해 강변 공원으로 재개발될 예정이다.[187] 2017년 9월 17일, 말라가 CF와의 경기에서 시비타스 메트로폴리타노의 개장식이 계획되었으며,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초청되었다. 이 경기에서 앙투안 그리즈만이 시비타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첫 공식 경기 득점자가 되었다.[188]
3. 1.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
구단은 현재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에서 안방 경기를 치른다.[306] 이 경기장은 마드리드의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전에서 패한 뒤, 구단이 경기장을 매입하여 수용 인원을 20,000명에서 68,000명으로 증대시켰다.[306][127][186] 경기장을 재단장한 후, 아틀레티코는 구장 개장 경기 상대로 말라가를 불러들였고, 앙투안 그리즈만이 새 구장의 1호골 주인공이 되었다.[306][12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2017년까지 수용 인원 54,990명의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을 사용했다.[185] 창설부터 1923년까지 ''론다 데 바예카스''를 본거지로 사용했으나, 1923년에 에스타디오 메트로폴리타노 데 마드리드를 건설하면서 비센테 칼데론으로 이전한 1966년까지 이곳에서 경기를 치렀다.
이전 경기장인 비센테 칼데론은 2020년 6월부터 철거가 진행되었으며, 부지에는 만사나레스 강과 면해 강변 공원으로 재개발될 예정이다.[187] 2017년 9월 17일, 말라가 CF와의 경기에서 시비타스 메트로폴리타노의 개장식이 계획되었으며,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초청되었다.[188]
3. 2. 훈련장
구단의 훈련장은 마드리드 서쪽 경계선에서 20km가량 떨어진 마하다온다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체육 도시이다.[307][128] 이 시설에는 천연 및 인조잔디 구장 외에도 실내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307] 1군부터 유소년 선수단이 모두 구단 소유의 훈련 시설을 공용으로 사용한다.[307][128]
아틀레티는 마하다온다에 누에보 세로 델 에스피노 체육 도시에도 체육 훈련 시설을 두고 있다.[308] 에스타디오 세로 델 에스피노는 다목적 경기장으로 클럽의 B팀이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다른 지부가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도 있는데, 이는 유럽 해외 무대에 둔 첫 훈련 시설이다.[308][129]
3. 3. 파키스탄 훈련장
2018년 10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라호르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신 훈련장 건립을 발표했는데, 이로써 파키스탄에 처음으로 유럽 구단의 훈련장이 들어섰다.[309] 2019년 4월, 구단은 라호르에 "축구 학교 프로그램"을 실시했다.[309] 같은 해 10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라호르에서 인재발굴 프로그램도 진행했다.[309] 2020년 2월, 파키스탄 축구 연맹은 2020-21 시즌 축구 연맹 리그 조를 발표했는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호르는 C조에 편성되어 파키스탄 프로 축구 리그에도 참가하게 되었다.[310] 이 구단은 하자라 콜을 상대로 첫 경기를 치러 2-0으로 이겼다.
4. 유니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초창기에 모구단이었던 아틀레틱 빌바오와 마찬가지로 청색과 백색이 반반인 유니폼을 입었지만, 1911년을 기점으로 현재의 적색과 백색 줄무늬 유니폼으로 바꾸었다.[192] 많은 사람들은 적색과 백색 줄무늬 유니폼이 도입된 데에는 침대 매트리스를 제작하는데 쓰이는 조합의 색과 동일하며, 잉여 옷감을 쉽게 축구 유니폼으로 바꿀 수 있음에 따라, 가장 저렴하게 유니폼을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 유니폼은 빨간색과 흰색 세로 줄무늬 셔츠, 파란색 반바지, 파란색과 빨간색 양말로 구성된다. 이 조합은 1910년부터 사용되었다. 유니폼은 2001년부터 나이키에서 제작되어 왔는데, 이는 아디다스와 계약한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쟁을 원하였기 때문이다.[311]
역대 유니폼 주 후원사로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아제르바이잔이 있었고, 국가의 문구인 '불의 나라'가 붙었는데, 이를 국경 없는 기자회가 줄무늬 유니폼을 감옥 창살로 묘사했고, "아제르바이잔, 억압의 나라"로 표현하며 비꼬았다.[311][13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인상을 홍보하기 위해서" 후원 계약을 맺었다 밝히면서 이 후원에 정치적인 이면이 있음을 인정했다.[312][131] 2014년 8월, 헬싱키 인권 재단은 아틀레티코에 아제르바이잔의 인권을 빗대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인 나라"라 묘사하며 홍보 후원을 중단하라는 권고문을 보냈다.[313][132]
이전 후원사로는 컬럼비아 픽처스가 있는데, 후원사의 로고와 유니폼 자체가 자주 변경되었는데, 그 예시로 ''스파이더맨 2''이 상영할 당시의 원정 유니폼이 있다.[314] 영화 개봉 일정과 발을 맞추기 위해서 유니폼 스폰서의 빠른 교체가 불가피하였기 때문에, 나이키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제작된 레플리카 유니폼에 스폰서를 부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2023-24 시즌 스폰서는 다음과 같다.
게시 위치
스폰서명
표기
게시 연도
비고
가슴
리야드 항공(Riyadh Air)
RIYADH AIR
2023년 -
등 하단
ria Money Transfer
2021년 -
소매
현대자동차(Hyundai)
Hyundai
2018년 -
역대 스폰서는 다음과 같다.
기간
메인 스폰서
기타
1903-1987
없음
1987-1990
미타 공업
없음
1990-1993
마르베야
없음
1993-1994
안테나 3
없음
1994-1996
마르베야
없음
1996-1997
반다이 / 다마고치
없음
1997-1999
마르베야
없음
1999-2000
없음
2000-2002
Idea Electrodomésticos
없음
2002-2003
Idea Electrodomésticos / Centenario del club
없음
2003-2004
컬럼비아 픽쳐스
Racer
2004-2005
AXN
2005-2006
기아(起亞自動車)
2006-2008
교세라 / ASISA
2008-2011
교세라 / Ålands Penningautomatförening
2011-2012
Rixos Hotels / 화웨이(ファーウェイ)
교세라 / Doyen Group
2012-2013
화웨이 / Azerbaijan, Land of Fire
교세라
2013-2014
Azerbaijan, Land of Fire
교세라 / 화웨이
2014-2015
화웨이 / Plus500
2015-2016
Plus500
Azerbaijan, Land of Fire / 화웨이
2016-2018
없음
2018-2019
현대자동차 / 세이브 더 칠드런
2019-2020
현대자동차 / Ria Money Transfer / 세이브 더 칠드런
2020-2021
현대자동차 / Ria Money Transfer / 세이브 더 칠드런 / VERSUS
2021-2022
현대자동차 / Ria Money Transfer / 세이브 더 칠드런
2022-2023
WhaleFin
2023-
RIYADH AIR
유니폼 공급업체는 다음과 같다.
기간
[유니폼 공급업체/키트 스폰서]
1903-1950
없음
1950-1980
Deportes Cóndor
1980-1982
메이바(Meyba)
1982-1998
푸마(Puma)
1998-2001
리복(Reebok)
2001-
나이키(Nike)
5. 선수
스페인 팀은 유럽 연합 시민권이 없는 선수를 3명으로 제한한다. 선수단 목록에는 각 선수의 주 국적만 포함되어 있으며, 선수단에 있는 비유럽 선수 중 일부는 유럽 연합 국가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코토누 협정에 서명한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의 ACP 국가 출신 선수는 콜팍 판결로 인해 비유럽 쿼터에 포함되지 않는다.[304][117]
;라리가 2024-25 기본 포메이션 (3-5-2)
괄호 안의 국기는 그 외의 보유 국적을, 별표는 EU 외 선수임을 나타낸다.
(※1) EU 외 선수이지만, 라리가에서는 외국인 선수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다.
== 현재 선수 명단 ==
2024년 8월 27일 기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현재 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304][117] 선수들의 국적은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표시되어 있으며,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진 선수도 있을 수 있다.
코케는 2009년부터 아틀레티코 유니폼을 입고 650경기 이상을 소화했으며, 앙투안 그리에즈만은 187골로 클럽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44]주앙 펠릭스는 1억 2,600만 유로로 클럽 역대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으며, 앙투안 그리에즈만은 1억 2,000만 유로로 클럽 역대 최고 판매액을 기록했다.
아델라르도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551경기에 출전하여 구단 최다 공식 경기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320]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전설이 된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172골로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이며,[326]아드리안 에스쿠데로는 150골로 라 리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329] 주앙 펠리스는 €126M에 입단한 역대 최고 이적료 영입 선수이며, 앙투안 그리즈만은 €120M에 구단을 떠난 역대 최고 이적료 방출 선수이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다양한 대회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스포츠 상인 코파 스타디움을 수상했다.[297] 2014년에는 왕립 스포츠 훈장 금메달을 받았다.[298] 글로브 사커 어워즈에서는 2014년에 특별상을 받았고,[299] 2012년과 2018년에는 올해의 최우수 구단으로 선정되었다.[300][301] 2018년에는 IFFHS 올해의 구단으로 선정되었다.[302]
캄페오나토 레히오날 센트로에서는 1920-21, 1924-25, 1927-28, 1939-40 시즌에 우승하여 총 4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는 여러 선수들이 피치치 상을 수상했다. 1940-41 시즌 프루덴 (30골), 1968-69 시즌 호세 에우로히오 갈라테 (14골), 1969-70 시즌 호세 에우로히오 갈라테 (16골)와 루이스 아라고네스 (16골), 1970-71 시즌 호세 에우로히오 갈라테 (17골), 1984-85 시즌 우고 산체스 (19골), 1988-89 시즌 바우타자르 (35골), 1991-92 시즌 마놀로 (27골), 1997-98 시즌 크리스티안 비에리 (24골), 2008-09 시즌 디에고 포를란 (32골)이 피치치 상을 수상했다.
사모라 상은 1939-40 시즌 페르난도 타바레스 (1.38 실점), 1948-49 시즌 마르셀 도밍고 (1.16 실점), 1976-77 시즌 미겔 레이나 (0.96 실점), 1990-91 시즌 아벨 레시노 (0.51 실점), 1995-96 시즌 프란시스코 몰리나 (0.76 실점), 2012-13 시즌 티보 쿠르투아 (0.78 실점), 2013-14 시즌 티보 쿠르투아 (0.68 실점), 2015-16 시즌 얀 오블락 (0.47 실점), 2016-17 시즌 얀 오블락 (0.72 실점), 2017-18 시즌 얀 오블락 (0.59 실점), 2018-19 시즌 얀 오블락 (0.76 실점), 2020-21 시즌 얀 오블락 (0.66 실점)이 수상하였다.
2013-14 시즌에는 디에고 코스타 (27골)가 사라 상을 수상했다. LFP 어워드에서는 2012-13 시즌 티보 쿠르투아 (최우수 골키퍼)와 디에고 시메오네 (최우수 감독), 2013-14 시즌 디에고 시메오네 (최우수 감독), 2015-16 시즌 앙투안 그리즈만 (최우수 선수), 디에고 고딘 (최우수 수비수), 얀 오블락 (최우수 골키퍼), 디에고 시메오네 (최우수 감독)이 수상했다.
발롱도르에서는 1987년 파울루 푸트레가 실버볼을, 2016년과 2018년에는 앙투안 그리즈만이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골든 보이는 2007년 세르히오 아구에로, 2019년 주앙 펠릭스가 수상했다. UEFA 유로파 리그에서는 2011-12 시즌 라다멜 팔카오 (12골)가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8. 경쟁 관계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는 정체성과 엇갈리는 행보로 극명히 대조되는 두 구단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상류층 밀집지역인 북부 마드리드의 차마르틴 연고인데 반해, 아틀레티코의 전 안방인 비센테 칼데론은 도심에서 1.8km 떨어진 중남부 마드리드의 노동계급 밀집지역 아르간수엘라를 연고로 했다. 역사적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기득권의 구단으로 비추어졌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철권통치기 초반에 정권으로부터 지지받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반항 정신''(sentimiento de rebeldía)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아틀레티코는 공군 구단과 합병해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으로 개칭했었고, 1950년대에 레알 마드리드를 선전도구로 써먹기 전까지 동행했다.
독재 정권은 스페인이 국제적으로 고립된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가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했을 때 이를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었다. 한 때 프랑코 정권의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던 페르난도 마리아 데 카스티에야는 "레알 마드리드는 우리가 보유했던 최고의 외교관들이다"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이 관념은 도시의 축구 정체에 있어서 공동 인식을 두드려 큰 영향을 주었다. 그로 인해, 아틀레티코 지지자들이 ''"마드리드 만세, 마드리드 만세, 정부의 팀, 국가의 수치"'' (Hala Madrid, hala Madrid, el equipo del gobierno, la vergüenza del país) 라고 마드리드 찬가를 개사하여 가장 자주 부르는 자들로 추측되고 있다.
최근 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숙적과의 싸움에서 크게 고전했는데, 2012-13 시즌에 14년이 지나서야 무승 기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이 연속 무승의 기록은 2013년 5월 17일에 깨졌는데, 아틀레티코는 연고지 숙적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2013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2-1로 이기며 수렁에서 빠져나왔고, 2013년 9월 29일에는 베르나베우에서 또다시 1-0으로 이기며 연속 승리를 거두었다. 두 팀은 2014년과 2016년 결승전에서 맞붙었고, 레알 마드리드가 두 경기 모두 승리했다.
2014년 마드리드 더비
8. 1. 마드리드 더비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정체성과 엇갈리는 행보로 극명히 대조되는 두 구단이다.[286] 레알 마드리드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상류층 밀집지역인 북부 마드리드의 차마르틴 연고인데 반해, 아틀레티코의 전 안방인 비센테 칼데론은 도심에서 1.8km 떨어진 중남부 마드리드의 노동계급 밀집지역 아르간수엘라를 연고로 했다.[100] 역사적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기득권의 구단으로 비추어졌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철권통치기 초반에 정권으로부터 지지받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반항 정신''(sentimiento de rebeldía)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아틀레티코는 공군 구단과 합병해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으로 개칭했었고, 1950년대에 레알 마드리드를 선전도구로 써먹기 전까지 동행했다.[286]
독재 정권은 스페인이 국제적으로 고립된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가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했을 때 이를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었다. 한 때 프랑코 정권의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던 페르난도 마리아 데 카스티에야는 "레알 마드리드는 우리가 보유했던 최고의 외교관들이다"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287][101] 이 관념은 도시의 축구 정체에 있어서 공동 인식을 두드려 큰 영향을 주었다. 그로 인해, 아틀레티코 지지자들이 ''"마드리드 만세, 마드리드 만세, 정부의 팀, 국가의 수치"'' (Hala Madrid, hala Madrid, el equipo del gobierno, la vergüenza del país) 라고 마드리드 찬가를 개사하여 가장 자주 부르는 자들로 추측되고 있다.
최근 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숙적과의 싸움에서 크게 고전했는데, 2012-13 시즌에 14년이 지나서야 무승 기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이 연속 무승의 기록은 2013년 5월 17일에 깨졌는데, 아틀레티코는 연고지 숙적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2013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2-1로 이기며 수렁에서 빠져나왔고, 2013년 9월 29일에는 베르나베우에서 또다시 1-0으로 이기며 연속 승리를 거두었다. 두 팀은 2014년과 2016년 결승전에서 맞붙었고, 레알 마드리드가 두 경기 모두 승리했다.
8. 2. 바르셀로나와의 악연
바르셀로나와도 오랜 악연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도 또한 스페인 축구의 또다른 "고전 더비"로 인식된다.[288][289] 한때 카탈루냐 구단 쪽으로 우세가 기울었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두 구단의 경쟁관계는 팽팽해졌다.[288][289] 2016년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바르셀로나를 꺾었다.[288][289]프랑스 국가대표 공격수 앙투안 그리즈만이 2019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졌고, 이후 그리즈만은 2021년에 바르셀로나의 재정난으로 아틀레티코로 복귀했다.[288][289]루이스 수아레스도 2020년에 아틀레티코로 이적하면서, 알레티의 리그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288][289] 그러나, 최대 경쟁 구단은 이웃 "머랭 군단"이다.[288][289]
9. 수뇌부
9. 1. 기술진
구스타보 로페스/구스타보 로페스es
골키퍼 코치
파블로 페르세요네/파블로 페르세요네es
체력 코치
오스카르 오르테가/오스카르 오르테가es
물리치료사
이반 오르테가/이반 오르테가es 헤수스 바스케스/헤수스 바스케스es 에스테반 아레발로/에스테반 아레발로es 다비드 로라스/다비드 로라스es 펠리페 이글레시아스 아로요/펠리페 이글레시아스 아로요es
재활 물리치료사
오스카르 피티야스/오스카르 피티야스es 알프레도 하로디크/알프레도 하로디크es
기술보좌관
카를로스 메넨데스/카를로스 메넨데스es 다니엘 카스트로/다니엘 카스트로es
선수단 대리
페드로 파블로 마테산스/페드로 파블로 마테산스es
수석 의료진
호세 마리아 비얄론/호세 마리아 비얄론es
구단 주치의
고르카 데 아바호/고르카 데 아바호es
주치의
오스카르 루이스 셀라다/오스카르 루이스 셀라다es
기술진원
크리스티안 바우티스타/크리스티안 바우티스타es 딤초 필리체프/딤초 필리체프bg 페르난도 산체스 라미레스/페르난도 산체스 라미레스es 마리오 세라노/마리오 세라노es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151009052931/http://en.clubatleticodemadrid.com/jugadores-primer-equipo Atlético Madrid]
9. 2. 감독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마르틴 마르쿨레타가 대행 감독을 맡았고, 1936년 주제프 사미티에르가 감독을 맡았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는 리카르도 사모라가 감독직을 수행했다. 엘레니오 에레라는 1949년부터 1952년까지, 하신토 킨코세스는 1954년부터 1955년까지 감독을 맡았다. 페르디난드 다우치크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아드리안 에스쿠데로는 1963년에 감독을 역임했다.
루이스 아라고네스는 1974년부터 1980년, 1982년부터 1987년, 1991년부터 1993년, 그리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여러 차례 감독직을 수행하며 총 612경기를 지휘했다. 1975년부터 1976년에는 파키토 가르시아가 감독을 맡았다. 비센테 미에라는 1986년에,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는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감독을 맡았다. 론 앳킨스는 1988년부터 1989년까지, 하비에르 클레멘테는 1989년부터 1990년까지 감독을 역임했다. 토미슬라브 이비치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감독을 맡았다.
알피오 바실레는 1995년에 감독을 맡았고, 라도미르 안티치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총 188경기를 지휘했다. 아리고 사키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감독을 역임했다. 마르코스 알론소 페냐는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감독을 맡았다. 그레고리오 만사노는 2003년부터 2004년, 그리고 2011년에 감독을 맡았고, 세사르 페란도는 2004년부터 2005년까지 감독을 역임했다. 카를로스 비안치는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감독을 맡았다.
하비에르 아기레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총 131경기를 지휘했다. 키케 플로레스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총 102경기를 지휘했다. 헤르만 부르고스는 2018년에 대행 감독을 맡았다. 2011년부터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현재까지 팀을 이끌고 있으며, 2023년 6월 23일 기준으로 627경기를 지휘했다.
9. 3. 회장
2002년부터 엔리케 세레소 토레스가 클럽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118] 미겔 앙헬 길 마린 (전 클럽 회장 헤수스 힐의 아들)이 최고 경영자(CEO)로 재직하고 있다.[119] 2021년 유상 증자 이후, 길 마린, 세레소, 그리고 신규 투자자인 아레스 매니지먼트는 '아틀레티코 홀드코'를 통해 주식의 66.98%를 보유하고 있다.[120] 이스라엘 사업가이자 억만장자인 이단 오페르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지분 33%를 소유하고 있다.[5][6][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2002-03 시즌 라리가로 승격한 이후, 2023-24 시즌까지 프리메라리가에서 88시즌, 세군다 디비시온에서 6시즌을 보냈다. 2002-03 시즌에는 11위를 기록했고, 2004-05 시즌에는 11위를 기록했지만 인터토토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7-08 시즌에는 인터토토컵에서 우승하며 UEFA컵 32강에 진출했고, 리그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2008-09 시즌에는 디에고 포를란이 32골로 트로페오 피치치와 유러피언 골든슈를 획득하며 리그 4위를 기록,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했다.
2009-10 시즌에는 유로파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코파 델 레이에서는 준우승에 그쳤고, 리그에서는 9위를 기록했다. 2010-11 시즌에는 UEFA 슈퍼컵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나, 유로파리그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고, 리그 7위를 기록했다. 2011-12 시즌에는 유로파리그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며 유럽대항전 12연승 기록을 세웠지만, 리그에서는 5위에 머물렀다.
2015-16 시즌에는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또다시 레알 마드리드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고, 리그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2017-18 시즌에는 유로파리그에서 우승하며 세 번째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리그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2018-19 시즌에는 UEFA 슈퍼컵에서 우승하며 통산 세 번째 슈퍼컵 우승을 달성했고, 리그 2위를 기록했다. 2019-20 시즌에는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고, 리그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2020-21 시즌에는 루이스 수아레스의 활약에 힘입어 7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21-22 시즌에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 2022-23 시즌에는 리그에서 3위를 차지하였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023-24 시즌에는 리그 4위를 기록했고, 코파 델 레이 4강,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했다.
11. 클럽 관련 정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구단 역사상 여러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중 하나가 'Los Colchoneros'(매트리스 제작자들)이다. 이는 1군 선수들의 유니폼 줄무늬가 전통적인 매트리스의 색상과 같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Los Indios'(인디언)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외국인 선수 영입 제한이 풀린 후 구단이 여러 명의 남아메리카 선수들을 영입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홈구장이 강둑에 "캠프"처럼 자리 잡았거나, 'Los Indios'(인디언)가 구단의 도시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의 별칭인 'Los Blancos'(백인)의 전통적인 적이었기 때문이라는 다른 이론도 있다.[8]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은 2003년부터 구단의 명예 회장을 맡고 있다.[126]
프렌테 아틀레티코는 1982년에 창설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울트라 단체이다. 2014년에는 약 2,500명의 회원을 보유했으며, 스페인 축구에서 가장 큰 울트라 단체 중 하나였다. 같은 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프렌테 아틀레티코를 제명하고 경기장에서 이들의 상징물 전시를 금지했다. 프렌테 아틀레티코는 루흐 호르조프, AS 로마,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카탄차로, 스포르팅 히혼과 친목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 세비야, 에스파뇰, 발렌시아, 라요 바예카노, 데포르티보, 셀타, 레알 소시에다드, 아슬레틱, 오사수나, 알라베스, 사라고사, 말라가, 바야돌리드, 오비에도, 포르투, 스포르팅 리스본, 벤피카, 라치오,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울트라 단체와도 치열한 경쟁 관계를 보이고 있다. 과거 프렌테 아틀레티코의 하위 조직이었던 수브르비오스 펌(Suburbios Firm)과는 좋지 않은 관계이며 끊임없이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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